대전 최윤겸 감독(41)은 4일 지난해 단 한차례도 이기지 못했던 수원전을 승리하고도 화를 내고 있었다. “(김)성근이한테 부디 오늘 조심하라고 그렇게 일렀는데. 경고 받을 거면 차라리 다음 경기에서 받았으면 좋았을텐데….”

지난해 K리그에서 단 1승에 머물렀던 대전을 올시즌 누구도 예상치 못한 단독 2위(5승2무1패)로 이끌고 있지만 머릿속에는 다음 부산전을 대비하고 있었다.

지도자로서의 그의 삶은 꼴찌에서 올시즌 최대의 다크호스가 된 대전과 무척이나 닮았다. 2001년 8월 조윤환 감독의 사임으로 39세의 코치는 갑자기 부천SK의 젊은 감독이 됐고, 2002년 9월 특별한 이유없이 갑자기 경질됐다.

시즌 도중 경질이라는 수모를 겪으며 쓸쓸히 물러났던 부천 최 감독과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대전의 최 감독. 그가 변한 것일까 그를 바라보는 시각이 변한 것일까. 해답을 찾기 위해 최윤겸이라는 사람을 알아보자.

●축구를 계속 하는게 목표였던 선수 최윤겸

그의 선수시절의 키워드는 ‘불우했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키도 크고 운동을 잘하는 바람에 선생님의 권유로 축구를 시작했다. 그때부터 92년 은퇴할 때까지 수비수로 활동했다. “거칠고 태클을 심하게 했다. 지금 내가 추구하는 스타일과는 다르다”고 회고했다.

불행은 대전체중 2학년 때 축구팀이 해체되면서 시작됐다. 전학을 갔지만 별볼일 없는 중학교 실적 때문에 그는 받아주는 고교팀이 없어 1년을 학교를 다니지않고 ‘놀았다’.

“부모님께 너무 죄송했지만 어린 나이에도 ‘축구 아니면 내가 할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리저리 고교팀에 테스트를 받으러 다니며 힘든 나날을 보냈다.”

힘들게 들어간 홍주고도 축구팀이 강하지 않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4강에 들지못한 고교팀에서 1명은 대학에 입학하게 하는 ‘고교상비군 제도’의 혜택을 받아 때마침 창단한 인천대학에 진학했다.

“축구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날이었다. 지옥훈련을 받으면서도 친구들과 매일 1시간씩 줄넘기를 1년 동안 했다. 창단 3개월만에 준우승을 했고, 그해 추계연맹전에서 우승했다”

인천대의 활약을 계기로 88올림픽 상비군인 박종환 사단에 합류했고, 대표팀, 프로팀 유공(1986년∼1992년)에서 꾸준히 활약한 뒤 장딴지 부상으로 은퇴했다. 트레이너로 지도자의 길에 발을 들였다.

●지도자로서 눈을 뜬 두 번의 계기

부천 트레이너 시절 모셨던 러시아 출신 명장 니폼니시 감독은 뻥축구가 아닌 조직적인 축구를 알게 해줬다. 짧은 패스의 유기적인 연결, 조직적인 대전의 플레이의 뿌리를 엿볼 수 있다.

“통역이 있었기 때문에 꼼꼼히 메모할 수 있었다. 지금도 그때 적은 훈련 프로그램과 메모를 보고 작전에 힌트를 얻는다. 철저하게 상대팀과 우리팀 플레이를 분석하는 것도 그의 영향이다.”

부천에서 경질돼 ‘야인’이 된 것이 개안의 두 번째 기회였다. 지난해 10월 초까지 2주간, 11월 3주간 네덜란드에서 유소년 지도 연수를 받으며 지도자로서 기본기를 처음으로 되새겼다.

“솔직히 그때까지 의미를 모르면서 따라했던 훈련의 의미와 훈련을 어떻게 시켜야하는 지를 처음으로 알게됐다. 그제서야 아약스와 아인트호벤의 훈련이 한눈에 들어왔다”

대전의 사령탑을 맡으며 달라진 것을 확실하게 느꼈다. 훈련 프로그램을 짤 때나 작전 구상할 때 자신감이 생겼다. 모험적이고 관중을 위해서 경기를 하는 네덜란드 축구를 철학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지금 대전도 공격은 골키퍼부터, 수비는 공격수부터 시작하도록 주문한다. 네덜란드의 토털사커를 지향한다고 봐도 좋다.

●최윤겸은 변하지 않았으나 변했다

수원전을 앞두고 최 감독은 선수들에게 “이기려고 하지말고 나와 팬에게 너희들이 얼마나 열심히 뛰는지를 보여달라”고, 승리감을 느끼라고 주문했다. 그는 좀더 자신감 넘치고 열정적인 지도자로 변했다. 그러나 이미 그는 부천SK를 맡았을 때부터 열정적인 지도자였다. 임기만 보장됐더라면. 이제 대전에서 본색이 드러나는 건지도 모른다.

정은희기자
ehjeong@